즈라른 연성

[히지츠라] 땅이 하늘을 바라보기를

월영 (月影:香) 2017. 6. 26. 01:42

*자주빛 립스틱에서 이어집니다.


그 사람은 나를 한참이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겉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옆에 우산이 있는데도 쓰지 않고 멍하니 공원 입구와 시계를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을 그 남자는 어쩐지 처량해보였다.

“여기서 비 맞고 있으시면 감기에 걸릴 거예요.”

나는 그윽한 미소를 연출하며 그에게 우산을 건넸다. 옆에 우산이 있는데도 쓰지 않았다는 것은 나의 우산을 기다렸다는 뜻일지도 모르니까.

“그럼 아가씨는 밤에 누구를 만나기에 그렇게 꽃단장을 하고 돌아다니시나.”

“당연히 애인을 만나러 나왔지요. 낮에는 보는 눈이 많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우산을 들고 나를 우산 안쪽으로 향하게 자리를 바꾼 후 내 허리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바로 옆 정자로 가서 겉옷을 벗고는 목의 크라바트를 푸르고 의자 위에 올려놓고서 먼지를 털었다.

“앉으시지요. 카츠라 코타로 아가씨.”

“쳇, 알아챈 것인가. 역시 너의 목숨을…”

품속에 숨겨둔 작은 단검에 손을 갖다 대자, 순간 히지카타가 손목을 잡아당겼다. 나는 그대로 히지카타의 앞으로 넘어졌고 그는 의기양양하게 나를 올려다보며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

“그래보든지, 어차피 그 기모노 안에 검 하나쯤은 들어있을 거 아냐? 그래도 용케 알아냈네. 그 편지, 나름 머리 굴려가며 만든 건데.”

히지카타는 미소를 지으며 더 세게 나를 끌어당겼다. 버티고 있던 팔에 점점 힘이 부쳤고 그럴수록 그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그 더러운 인상,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얼굴. 지독한 담배냄새.

“어떻게 나라는 걸 알았지? 해결사에게 들어보니 썩 나쁜 머리는 아닌 것 같다만.”

나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어찌되든 버티기 위해 팔에 힘을 주는 데에 안간힘을 썼지만 무식한 대형견처럼 끌어안아오는 그의 힘을 이길 수 없었고 그대로 히지카타 위에 살포시 올라탔다.

“대답 안 할 거면 내 용건 먼저 처리한다. 고개 들어봐, 망할 카츠라.”

이를 갈며 고개를 들자, 그의 얼굴이 다가왔고 내 입술에 그의 입술이 맞닿았다. 히지카타의 어깨 위에 팔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빗소리에 상스러운 우리의 숨소리가 화음을 만들었고, 그대로 입과 함께 내 정신을 지배하면서 빗방울이 내 얼굴을 타고 그에게 전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혼돈 속에서 서로를 묶어놓다가 달빛이 우리를 비추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둥 일어나 거친 숨을 내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아, 이제. 이유나 말해보시지. 망할 즈라.”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달빛 아래 붉게 타오르는 그의 석양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는가. 예전, 사람들은 지구가 네모난 땅이고, 하늘은 둥글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틀렸어. 하늘과 땅은 모두 둥글었다네.”

“그래서.”

“자네가 써 보낸 글자는 둥근 하늘(天円) 허나 그것이 위아래로 뒤집혔으니 네모난 땅(土方)이지 않겠나.”

갑자기 히지카타가 크게 웃더니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는 내 손을 그의 가슴팍에 올려놓았다.

“잘도 알아챘군. 그러니 이 심장을 노릴 수 있겠지.”

내 손 아래에는 당장에 찔러야할 심장이, 나를 향해 두근거리는 작은 심장이 위치해있다.

“내 생일이니. 오늘만큼은 자네를 찌르지 않겠네. 나에게 감사해 하게나.”

사악한 미소로 그를 쳐다보자 히지카타는 내 손을 그대로 놓으며 젖은 겉옷을 들고서 그대로 일어나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 손에 자신의 입을 맞추더니 거만한 표정으로.

“참 고맙네. 망할 즈라.”

“역시 자네랑 나는 성격 자체가 맞지 않아. 흥, 어서 그 입술에 있는 립스틱이나 닦으시게.”

“싫다.”

“지우라고 말했네.”

“그러면 지우지 말아야겠네.”

타카스기만큼, 아니 훨씬 더 꼬여있는 그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속으로는 그 누구보다 부드러운 미소로 그를 반겼다. 만나서는 안 되는, 서로에게 검을 겨누어야 하는. 얄궂게도 그런 우리는 일 년에 단 두 번. 서로에게 자유로울 수 있다.

“가자, 생일 지난다.”

“흥, 먼저 가게. 뒤에서 내 목을 노릴지 어떻게 아나?”

그 자유롭지 못한 자유 속의 우리는 그저 새장 속의 새일 뿐이다.

“아직도 두 시간 남았어. 그때까지는 괜찮잖아, 코타로.”

그에게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러주며 미소를 지으며, 누구보다 차가운 토시로의 손위에 내 손을 얹었다.

“가지, 토시로.”

고개를 돌린 채, 서로의 손이 하나가 되고 반대쪽 손에는 젖지 않은 우산과 젖어버린 우산을 들었다. 그는 입술을 겉옷으로 닦으며 나에게 손수건을 건넸고 나는 그 손수건에 키스마크를 남겼다.

이 자유롭지 못한 자유 속에서 서로를 갈망하는 보잘 것 없는 운명에 서로 쓴 미소를 지으면서, 서로의 뜨겁디 뜨거운 심장을 노리면서 서로의 건강을 걱정하는, 우리는.

결코 그 넓은 우주 밖을 벗어나지 못한다.